공원 속의 밀도

판교에서 20분, 도착한 곳은 숲과 호수였다. 선정된 사람들이 1박2일 모인 해커톤. 그 공간이 좋았던 건 넓거나 비싸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가 분명해서였다. 동선도, 공원 속 거리까지도 다 설계였다. 목적이 분명한 공간은, 사람을 그 목적대로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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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속의 밀도

#02 그레이 (Kim Hyunseung) · 2026년 6월


공원 속으로

판교에서 차로 20분. 그런데 도착한 곳은 숲과 호수였다.

경기도 용인, 한 IT 기업이 운영하는 연수원. 빌딩 숲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문을 들어서면 도시가 사라진다. 한적한 공원 한가운데, 컨퍼런스홀과 식당과 회의실과 테라스와 숙소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가깝지만 떨어져 있는 곳. 그 거리가 묘하게 좋았다.

나는 오픈소스를 활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1박2일 해커톤에 참여하러 그곳에 갔다. 그리고 공간을 보는 내 버릇대로, 사람보다 먼저 그 자리를 읽기 시작했다.

선정된 사람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곳에 아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해커톤은 선정된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신청한다고 다 오는 자리가 아니라, 골라서 부른 자리. 1박2일 동안 그 사람들은 화면 속 코드가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무언가를 만들었다. 밤이 깊도록 작업하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테라스에서 쉬었다.

규모로 보면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었다. 넓은 공간에 선정된 소수. 비어 있는 듯한데, 묘하게 꽉 찬 느낌이었다.

그곳이 스스로 부른 이름

그 공간은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성장의 터전. 화면을 벗어나 진짜로 만나는 곳. 그들은 구성원을 크루라 부르고, 온라인을 위한 오프라인이라는 말을 썼다. 평평한 화면에서 벗어나 진짜 감각을 되찾는 것,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대하며 자라는 것. 벽과 안내문 곳곳에 그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좋은 말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말들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조금 다른 것이 궁금해졌다. 이 공간은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을까.

무엇을 위한 자리인가

그 공간이 좋았던 건, 넓거나 잘 지어서가 아니었다.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가 분명해서였다.

해커톤의 규칙은 단순했다. 누가 더 잘 만드나를 겨루지 않았다. 빠른 결과 대신, 오픈소스와 열린 자원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끌어다 함께 만들었는가를 봤다. 그래서 작업하는 자리 옆에, 무엇을 만들었는지만큼 누구와 연결되었는지를 남기는 자리를 따로 두었다. 결과물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관계가 쌓인 흔적을 남기는 자리였다.

공간도 그 목적을 따라 설계돼 있었다. 컨퍼런스홀과 작업실과 식당과 테라스와 숙소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발표를 듣다가 그대로 옆방에서 만들고, 막히면 테라스로 나가 바람을 쐬고, 밤이 늦으면 같은 건물에서 잤다. 흩어질 일이 없으니 사람들 사이가 끊기지 않았다. 도시 한복판이었다면 저녁이 되면 각자 흩어졌을 것이다. 공원 속에 두어 돌아갈 곳을 없앤 것 그것마저 설계였다.

좋은 공간은 우연히 좋아지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가 먼저 분명하고, 그다음 모든 것이 거기 맞춰질 때 좋아진다. 넓이도, 동선도, 심지어 도시에서 떨어뜨려 놓은 거리까지.

온라인을 위한 오프라인

그곳에서 가장 오래 남은 말은 온라인을 위한 오프라인이었다.

오픈소스를 다루는 사람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화면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데 그들을 굳이 숲속 한자리에 모았다. 화면으로 충분한 시대에, 화면으로 안 되는 것을 위해.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밥을 먹고, 밤을 새우며 쌓이는 것 그건 아무리 좋은 도구로도 화면 안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이런 시도가 그곳만은 아닌 듯하다. 말레이시아에는 온라인으로만 연결되던 빌더들이 한곳에 모여 살며 배우고 일하는 실험이 있다고 들었다. 도구가 더 많은 일을 대신할수록, 사람이 진짜로 모이는 자리는 더 귀해진다. 그 연수원은 그것을 알고 지어진 공간이었다.

그곳은 스스로를 성장의 터전이라 불렀다. 나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르게 부른다. 밀도라고. 좋은 공간은 사람을 많이 들이는 곳이 아니라, 들인 사람들 사이를 짙게 만드는 곳이다. 비워서, 골라서, 시간을 들여서.

목적이 분명한 공간은, 사람을 그 목적대로 모은다. 나는 그것을 공원 속 한 연수원에서 다시 보았다.


공간 100 · #02 · 그레이 (Kim Hyunse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