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편을 쓰고 나서
나는 열여덟 편의 글을 쓰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글이 글쓴이보다 앞서면 질문이 사람에 가려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리즈가 끝났으니 한 번은 드러내려 한다. 왜 썼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이제 부산에서 무엇을 빌드할 것인지.
18 Questions for Next Busan — 후기 그레이 (Kim Hyunseung) · 2026년 6월
왜 썼는가
나는 열여덟 편의 글을 쓰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쓰지 않았다.
'18 Questions for Next Busan'은 18일간 매일 한 편씩, 부산에 대한 질문을 던진 시리즈다. 한국어와 영어로, 모두 서른여섯 편. 그런데 그 어느 편에도 나는 없었다. 의도한 일이다. 글이 글쓴이보다 앞서면, 질문이 사람에 가려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숨었다.
이제 시리즈가 끝났으니, 한 번은 드러내려 한다. 왜 이걸 썼는지를 말하려면,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산에서 12년 가까이 빌더들의 커뮤니티를 운영해왔다. 스타트업 행사를 열고, 외국에서 온 사람을 부산에 안내하고, 부산 사람을 외국에 데려갔다. 그 12년 동안 한 가지 생각이 점점 또렷해졌다. 연결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실행으로 이어지는 신뢰의 깊이가 가치를 만든다. 명함을 주고받는 일, 한 번 열리고 끝나는 행사, 화려한 스펙 그런 것이 도시를 바꾸지 못하는 걸 너무 많이 봤다.
부산은 좋은 것을 자주 흘려보냈다. 사람을, 기회를, 막 쌓이려던 신뢰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더는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모두가 누구를 뽑을까만 말할 때, 정작 묻고 싶었던 것은 어떤 부산인가였다. 그것이 이 열여덟 편을 쓴 이유다.
어떻게 썼는가
나는 개발자가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도시 정책 전문가도 아니다.
그런데 18일간 매일, 한국어와 영어로 한 편씩 내고, 각 편을 학술 데이터베이스에 등록까지 했다.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AI와 함께였다. 자료를 찾고, 문장을 다듬고, 영어로 옮기고, 구조를 점검하는 일을 매일 밤 함께 했다.
쓰는 동안 지킨 원칙은 단순했다. 첫째, 한 글은 한 가지 메시지만 갖는다.
받침이 아무리 좋아도, 그 한 가지를 흐리면 덜어냈다.
욕심나는 통계를, 멋진 사례를, 여러 번 버렸다. 빼는 것이 답일 때가 많았다.
둘째,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내 사업도, 내 이력도, 내 공간도 글에 넣지 않았다.
한 편에서는 내 경험을 받침으로 쓸 뻔했지만, 끝내 익명으로 돌렸다.
글이 해본 사람의 글임을 증명하는 건 이름이 아니라 문장의 밀도라고 믿었다.
셋째, 변하지 않는 것을 쓴다. 시장이 누구로 바뀌든, 부산이 빌드해야 할 것은 같다.
나는 그 변하지 않는 것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썼는가
열여덟 개의 질문은 흩어져 보였다. 청년은 왜 떠나는가, 바다는 부산의 무엇인가, 부산은 무엇을 측정하지 않는가, 누구를 부산 사람으로 알아보는가, 어떻게 사람을 기르고 모으고 잇고 쌓는가.
그런데 다 쓰고 보니, 그 질문들이 하나로 모였다. 신뢰였다. 부산이 측정하지 않은 것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떠난 사람과 끊긴 것도 모두 신뢰였다.
그리고 신뢰는 한 가지 일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일.
누가 진짜인지를 알아보고, 거기서 신뢰가 자라고, 신뢰가 쌓여 제도가 되고, 제도가 사람을 넘어 남는다.
막연히 품어온 생각이, 열여덟 편을 거치며 한 줄로 정리됐다.
쓰기 전엔 이렇게 또렷하지 않았다. 쓰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시리즈는 독자를 위한 것이었지만, 가장 많이 배운 건 나였다.
이제 무엇을 하는가
열여덟 편은 질문이었다. 질문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빌드다.
알아봄을 신뢰로, 신뢰를 제도로 빌드하는 일은 글로 되지 않는다.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시간을 들여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려 한다.
어떻게 할지는 아직 다 그리지 못했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부산을 글로벌 항만 도시들의 네트워크 안에 다시 놓는 일.
떠난 사람을 세계의 지점으로 잇고, 도착한 사람이 머물 자리를 빌드하는 일.
나는 빌더다. 열두 해 동안 부산에서 사람과 커뮤니티를 빌드해왔고, 앞으로 할 일도 결국 빌드다. 열여덟 편을 쓰는 동안 숨어 있었지만, 빌드는 숨어서 할 수 없다.
빌더는 자기가 짓는 것 곁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후기로 처음 이름을 쓴다.
이제 부산에서, 리빌드를 시작한다.
그 과정을 여기에 계속 쓸 것이다. 이번엔 질문이 아니라, 짓는 이야기로.
부산에서 시작한다. 부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엔 흘려보내지 않는다.